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레이쇼 게이츠 (문단 편집) === 몰락 === 1780년, 독립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은 눈을 남쪽으로 돌려 남부공략에 나섰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부유한 경제 중심지인 찰스턴이 함락당하고 식민지군의 남부군은 궤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부유한 남부를 잃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새로운 사령관을 파견해 남부군을 복구하고 영국군을 막아내는것이 급선무였다. 워싱턴은 자신의 유능한 부관인 [[너대니얼 그린]]을 대륙회의에 추천했으나 대륙회의는 게이츠를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은 게이츠의 임명에 결사반대했지만 대륙회의는 임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인 야심만 많고 능력은 없는 모습을 제대로 과시했다. 당시 남부군의 정규병력은 영국군에 패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폭동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영국군 사령관 헨리 클린턴의 뻘짓[* 남부로 내려간 후 포고문을 발표해서 국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인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독립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하던 남부 사람들은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로 갈려서 서로의 농장과 집으로 쳐들어가 약탈하고 보복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으로 남부는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의 민병대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정규군의 사기가 땅바닥을 뚫을 기세라 게이츠는 민병대를 너무 믿어버렸다. 게이츠의 남부군에 합류한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와 개싸움을 벌이다가 왔으니 당연히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과 싸워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1780년 8월 16일, 게이츠가 지휘하는 남부군과 독립파 민병대 3700여명은 영국군 남부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해 연승중이던 콘월리스의 2100여명의 병사와 캠던이라는 곳에서 맟부딫쳤다([[캠던 전투]]). 이때 게이츠는 경험없는 민병대를 선두에 세우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저지른다. 게이츠는 단순하게 사기가 충천한 독립파 민병대들을 앞세워서 영국군의 전열을 흐트러트린 후에 정규병사들이 영국군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들을 고문하고 보복할줄만 알았지 영국군 같은 정규군을 맞닥뜨리자 싸우기는 커녕 모두 도망쳤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영국병사들은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우리가 소리만 질렀더니 저놈들이 냅다 튀었다.'고 회고할 정도. 민병대들이 전열이 무너지고 도망치자 사기가 바닥을 뚫을 기세였던 정규군 병사들도 제대로 싸우기는 커녕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게이츠는 말을 타고 열심히 북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빨리 말을 몰았던지 단 며칠만에 300km가 넘는 거리를 주파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아마도 게이츠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그렇게 걸음아 나살려라라고 도망쳤다고 보는데 결국 게이츠는 새러토가의 영웅에서 겁쟁이로 한순간에 추락했다. 게이츠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은 '그 영감이 그 나이에 그렇게 말을 빨리 몰다니 대단하다'고 비꼬았을 정도. 결국 게이츠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했으나 적반하장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다. 결국 그는 이후 야전사령관으로는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뉴잉글랜드에 그의 지지자들이 좀 있던 터라 그들의 노력으로 1782년 뉴버그로 가서 워싱턴의 참모로 일할 수는 있게 되었다. 이듬해인 1783년에 일어난 소위 [[뉴버그 음모]]에 게이츠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이츠의 부관이었던 존 암스트롱 소령은 게이츠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연락하고 있었고, 역시 게이츠의 부하였던 월터 스튜어트 대령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과격선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게이츠가 이때도 음모에 관여했을거라고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